[독일 여행] 독일 여행정보(상식, 여행팁, 여행지 추천, 경비, 여행코스)
독일의 부유함은 겉모습에도 잘 드러나 보인다. 잘 치장된 큰 도시, 화려한 추수행사들, 풍부한 예술과 문화, 방대한 숲만큼이나 다양한 생물 등. 하지만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독일의 역사는 아직도 무겁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곳 여행자들에게도 이 나라의 복잡한 과거와 오늘날 그 역사의 영향력을 집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통계 자료
정식명칭: 독일연방 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
면적 : 357,000 sq km
인구: 8,100만명
수도 : 베를린( Berlin (인구: 350 만명)
) 인종: 다수 백인과 소수 터키인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난민의 대부분이 독일에 흡수되었다.
언어 : 독일어
종교 : 90% 기독교인이며, 200만 여명의 이슬람교인과 30,000여명의 유대교인(유태인 학살 이전에는 50만명에 이르렀다)이 있다.
정체 : 연방 공화국
지리 및 기후
독일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특징적인 몇 개의 지형에 의해 나뉘어진다. 네덜란드에서 폴란드로 이어지는 평평한 북부 저지대는 북쪽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북부독일과 남부를 가르는 중앙고지대는 하르쯔산맥과 바바리아 삼림에 깊은 틈을 만들어 놓은 라인 단층괴로부터 뻗어나와 독일의 심장지대를 이룬다. 라인강과 마인강은 이 지역 남서부를 지나는데, 내륙으로 이어주는 수상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석탄도 풍부했기에 이 지역은 독일에서 최초로 산업화되었다.독일의 알프스는 바이에른 지역에 위치하며, 오스트리아 접경지대를 따라 빙하시대에 형성된 콘수탄체호수로부터 독일의 남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베르흐테스가덴까지 이어져 있다. 이곳의 산은 남쪽지방보다는 낮지만 그래도 2000m가 넘는다. 알프스 산허리에서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2966m)까지 환상적인 경치를 보여주고 있다.독일은 인구밀도가 높고 산업화된 나라로 자연주의자들을 위한 파라다이스는 분명 아니다. 국토의 3분의 1은 경작지이며, 조금 멀리 여행할 때는 도시를 거치지 않고 여행할 수는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 개발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야생생물을 위한 터전은 별로 없다(조류관찰은 물론). 대부분 숲도 독일방식대로 잘 정리 되어있다. 동남쪽 지대의 바바리아 숲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산악 숲 지대이며, 블랙 포리스트는 그래도 야생의 기운이 남아 있는 곳이다. 숲에 사는 동물로는 야생돼지와 사슴, 여우 등이 있으나 우루루 떼를 지어 다닐 정도는 아니다. 독일의 기후는 지역적인 차이는 보이지만 극단적인 변화는 없는 편이다. 가장 쾌적한 때는 5월에서 10월 사이로, 여름철은 북부지방에서도 반팔과 반바지 차림을 할 수 있다. 가을은 독일 여행에 가장 좋은 시기로, 숲 지대는 온통 황금빛으로 물드는 때이고, 관광인파와 숨막히는 더위로부터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참 돌아다니다 보면 아직은 갈증을 느낄 시기이므로 이 때는 독일의 맥주 한잔이 어느 때보다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겨울은 고원지대를 제외하고는 습한 편이다. 특히 눈이 내려 금방 녹아버리는 남쪽지대는 더하다.
역사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전 유럽의 역사를 좌지우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독일은 국내 분쟁과 외국 정복자의 힘에 눌려 불완전한 독립공국과 도시 국가형태의 혼합 상태로 존재해 왔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브란덴부르크 통치자가 이룩한 프러시아가 들어섰고 1871년에야 비로소 독일은 하나의 통일국가가 되었다. 그 이후에 일어난 많은 중요한 사건들은 독일인들이 자국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도록 하였다.
고대&중세 시대
라인강 서쪽지방과 마인강 남쪽지방은 로마제국의 영토였지만, 그 너머에 있던 야심만만한 용병부족들은 로마도 결코 진압할 수 없었다. 로마제국이 쇠잔해지면서 이 부족들은 작은 왕국들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유럽지방으로 뻗어 나갔다. 아헨국 왕족출신 프랑크족 정복자, 촬르마네가 대부분의 기독교권 유럽을 포함해 거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814년 그가 죽음으로써 제국은 분열되었다.AD962년 오토1세(오토대제)가 촬르마네 제국 동쪽지방에 <신성 로마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베네룩스를 포함하는 영토였다. <신성 로마>란 용어는 남아있던 로마 제국의 위엄을 계승하고자 붙여진 것이다.비엔나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가는 13세기 신성 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되는데, 이때쯤에 이르러 제국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제국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는 말로만 충성을 다짐하며 지방 군주들이 실세를 잡았던 도시국가들의 집합체 정도였다. 뤼벡을 중심으로 독일과 발틱 도시국가들이 연합한 한자 동맹이 1358년에 만들어지자 북부독일에 통합의 기운이 깃들었다(570).
종교 개혁
에르푸르트의 수도원출신 학자 마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그에 있는 한 교회 문에 95개의 정정사항을 붙인 후, 유럽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루터는 소위 죄를 저지른 자에게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면서 처벌을 면해주는 교회의 돈벌이 사업을 반대하였다. 1521년 교회는 그를 비난하였고 그는 아이젠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그성으로 숨었다. 그곳에서, 그는 희랍어로 쓰여있던 성경을 일상 생활에 사용되는 독일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구텐베르그가 발명한 인쇄기술로 인쇄되어 대중에게 읽히게 된 것이다.교회를 개혁하려는 루터의 노력은 상인들, 부유한 도시인들, 그리고 무었보다도 야심만만한 독일 왕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런 기존교회에 대한 반항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개혁이 일어났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협정으로 도시의 종교는 그 통치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포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로 불려지기 시작한 기존의 교회는 개혁 반박론으로 알려진 프로테스탄트교회 반대 캠페인을 폈다.
30년 전쟁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국가 사이의 긴장은 유럽 전역으로 발전되어 급기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은 30년 전쟁(1618-48)으로 이어졌다. 독일은 유럽 권력 싸움의 전장이 되면서 인구의 3분의 1과 수많은 도시, 마을을 잃게 되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모든 지역은 황폐화 되었고, 이것을 복구시키는데는 수세기가 걸렸다.1648년 베스트팔리아(Westphalia) 평화협정으로 독일은 두 종교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였고, 정치분쟁은 종식되었다. 독일어권 국가들은 신성 로마제국의 느슨한 토대 위에 독립적인 공국으로 남게되지만, 주요 영토들을 다른 국가에게 뺏기면서 계속 힘을 잃었다.
프러시아의 독일 통합
18세기는 베를린에 수도를 둔 프러시아 왕국이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로 발전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군인왕)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제)의 뛰어난 조직력으로 프러시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를 넘어 동쪽으로 팽창했다.19세기 분열되어 있던 독일은 나폴레옹의 정복 대상이 된다. 1806년 아우스텔리츠(Austelitz)에서 패한 후 오스트리아 출신 황제 프란시스 2세는 신성 로마 황제직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강인한 독일 저항의 주무대인 프러시아는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무참히 패배한 후, 독일은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 야망을 1813년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산산히 부수며 승리했다. 1815년 비엔나의회가 유럽의 국경선을 재정리하였을 때, 35개주로 구성된 독일연합이 신성 로마제국을 대체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총독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의회를 이끌게 되었다. 독일 연합은 1830년과 1848년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혁명으로 분열되지만 오스트리아 궁정은 분열된 독일을 계속 지배했다. 프러시아의 잘 다듬어진 군사력과 시민정신이 마침내 이런 상태를 깨뜨려, 1866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철의 재상)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단숨에 북부독일을 합병시켜 나갔다. 1871년 프러시아가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후 남부독일의 카톨릭세력과 반프러시아 국가들은 비스마르크와 협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프러시아의 왕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카이저)가 된다.
제 1차 세계대전과 히틀러 등장
빌헬름 1세의 아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1890년 추방시켜 버리지만, 이후 급속히 성장하는 독일의 정치적 이슈를 카이저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의 긴장상태는 점점 심해지고, 마침내 1914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 당시 독일의 유일한 동맹국은 힘이 약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뿐이었다. 전쟁으로 독일의 힘은 더 빨리 약화되었고 1918년 독일은 평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저는 폐위되어 네덜란드로 도망치고, 전쟁과 상실감이 증가하면서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쯤 나라에 대한 분노가 터져 버리고 만다. 베를린에 기지를 둔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주축이 되어 전면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이 봉기하지만, 그 지도자 칼 리베크네흐트(Karl Liebknacht)와 로자 룩셈부르그(Rosa Luxemburg)가 처형되면서 진압된다. 이어 바이마르공화국이 들어선다.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은 거대한 독일 영토를 잘라 버리고 엄청난 액수의 전쟁보상금을 부가한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계속적으로 보상을 요구하면서 라인강 지역을 점령했지만, 사실상 이를 지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계속된 물가인상과 비참한 경제환경 때문에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출연하게 되었다. 이들 중 한 명이 오스트리아출신의 독일 군인 아돌프 히틀러로, 그가 세운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 당(Nazi)은 1923년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나 실패로 돌아간다. 이로 인해 히틀러는 9달간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그의 저서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쓴다. 1929년 세계 경제공황은 특히 독일에 큰 영향을 미쳐 무수한 실업자, 파업과 거리의 시위를 야기시켰다. 에른스트 탤만이 이끌던 공산주의자당이 지지를 얻기도 하지만 부유한 자본가들은 나찌당을 지원하기 시작하고 경찰은 나찌당의 거리 시위대를 눈감아주게 되었다.나찌당은 일반 선거에서 힘을 더해가며 1933년 선거에서는 사회 민주주의당을 이기고 국회에 다수당으로 입성한다. 히틀러가 총독으로 임명되고, 다음해 그는 제3공화국이라고 부른(제3공화국이란 앞선 신성 로마제국과 빌헬름 1세의 독일제국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국가 최고 통치자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 분단
1935년부터 독일은 고속도로 건설 같은 전략적인 공공사업을 벌이며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히틀러는 1936년 라인강 지역을 재점령하고,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일부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드디어 1939년 9월 스탈린과 '양국이 동유럽에서 자유롭다'는 협정에 서명한 후,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독일은 재빨리 유럽의 많은 영토를 침략하지만 1943년부터 늘어만 가는 막대한 손해를 보기 시작한다. 무차별적인 폭탄공격으로 독일의 중심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고, 인구의 10%가 줄어들게 되었다. 독일은 1945년 5월 히틀러의 자살 이후 무조건 항복을 했다. 2차 세계대전에 일어난 최대의 비극은, 수백만의 유태인, 집시들이 역사상 최초로 집단 살해된 것이었다. 인종주의자 나찌당의 원리에 입각하여,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분류된 이 사람들을 유럽에서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수용소들이 세워졌다.얄타와 포츠담회의에서 연합군은, 독일을 26전 베르사이유조약에서 결정했던 것보다 4분의 1이나 축소해 국경을 재조정하였다. 동독에 살던 약 650만 독일 민족들이 이주 당하거나, 수 세기동안 살아온 동유럽에 있는 자신의 집을 빼았긴 채 독일로 쫓겨났다. 독일은 네 개의 점령지로 분할되었고 베를린에는 승리한 4개국이 연합하여 주둔하였다.소비에트 점령지에서는 사회주의연합당(SED)이 1946년 선거에 승리하며 빠르게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1948년 6월 구소련은 독일의 서방 점령지와 베를린 사이의 모든 육로교통을 차단하였다. 이 때문에 서방연합군은 유명한 베를린 공중보급(Berlin Airlift)이란 군사작전을 펴면서 구소련이 1949년 5월, 봉쇄를 풀 때까지 서베를린 지역에 비행기로 물자를 공급해야했다. 1949년 9월 독일연합공화국(BRD-구서독)이 서방지역에 들어섰고, 이에 대응해 다음달에는 구소련 주둔지에 독일민주공화국(DDR-구동독)이 베를린에 수도를 두며 형성되었다.
분단에서 통합까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방의 보호를 받으며 서독은 전후 미국으로부터 거대한 양의 자본을 받으면서 콘라트 아덴라우어의 지휘아래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동시에 동독은 구소련에 전쟁보상금으로 천억달러를 지불하며 거의 빈손으로 재건을 시작했다.서독의 경제적 우위는 비참한 동독의 숙련된 노동자들을 유혹하여 도망치게 했다. 동독은 이 사람들을 잃으면서 큰 타격을 받고 급기야 1961년에는 서베를린 둘레에 장벽을 쌓아 서독과의 국경을 봉쇄하기에 이른다. 냉전이 심화되면서 양 독일 진영의 TV와 라디오방송은 서로의 체재를 비난하는 방송을 부지런히 내보냈다.동독의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의 융통성있는 지도와 어울려, 서독의 오스트폴리티크(동독문제전담부)의 총독, 빌리 브란트는 두 독일 사이의 편안한 정치관계를 만들어 냈다. 1971년 구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독일에 주둔하던 4개국은 공식적으로 베를린의 분할을 인정하며 동의했다. 그러나 정작 서독은 많은 다른 서방국들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동독을 승인하지 않았다.비록 서독이 누리는 번영의 반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호네커의 정책은 동독에 높은 생활 수준을 창출했다.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구소련의 정권을 잡은 후로 동독 공산주의당은 구소련의 지지를 점차 잃게 되었다. 1989년 헝가리는 국경선 부근의 통제를 느슨히 하며 동독인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허락했다. 다른 동유럽국들과 마찬가지로 개혁을 요구하는 군중시위가 라이프찌히에서 일어났고, 곧 동독의 다른 도시로 퍼져 나갔다. 동독 정부는 헝가리로 여행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망명을 결심한 사람들은 프라하의 서독대사관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고르바초프는 동독에 개혁을 종용했지만 호네커는 거절하였다. 사임한 호네커를 그의 보안 책임자였던 에곤 크랜쯔(Egon Krenz)가 대신했으나 동독을 구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랜쯔는 자유선거를 약속했으나, 교활하게 11월 9일(나찌의 유태인 박해 수정일)을 선택하여 베를린 장벽을 열어야했다. 이 때문에 그날은 독일 공휴일로 축하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 지도권내의 부정부패가 밝혀지면서 크렌쯔와 그의 정치국은 한스 모드로우(Hans Modrow)가 이끄는 라이벌 개혁당 SED를 지지하며 권력을 내 주어야했다.평화와 인권보호 활동주의자들은 자유스런 사회주의적 동정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동독내에서 오랫동안 반대세력의 주축이었다. 개혁을 선호하던 대중의 분위기는 갑자기 바뀌어 서독과의 완전한 통일을 원했다. 헬무트 콜이 이끄는 기독민주연합당(CDU)은 동독 통화를 1대 1로 바꾸어주는 후한 환율을 적용하며 통일의 빠른 진전을 도모한다. 만약 1대 1 환율이 아니었다면 동독화폐는 환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의 몰락을 직접 체험하게되는 시민층 반대세력과 아울러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의 끝으로 몰리며 소외감을 느낀다.경제 전문가들은 근본적으로 경제구조가 다른 양 체재를 급속히 통합한다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동독기업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나 동독의 신임 CPU수상 로트아르 드 마지에르 (Lothar de Mazi re)는 1990년 7월 1일 통화통합을 결정한다. 콜 수상도 서독국민들에게 통일을 한다해도 세금을 올리는 일은 없을 거라며 안심시킨다. 그해 9월 동.서독과 연합군은 2 플러스 4 조약(Two-Plus-four Treaty)에 사인하고 전후 점령지 체재를 마감한다. 독일은 1945년 이후로 폴란드와 구소련에 합병된 영토를 받아들이고 동쪽 국경선을 승인한다. 1990년 10월 3일 독일민주공화국이 독일연방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으로 합쳐진다. 콜수상이 이끄는 CPU 연합당이 1990년 12월 2일 전독일 선거에서 야당 사회당을 물리친다.
중간에 선 나라 독일
많은 염세주의자들조차 통일에 드는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예측하지 못했다. 동독과 서독은 곧 서로서로를 베시스와 오시스(Wesis, Ossis-서쪽 사람, 동쪽 사람이라는 뜻)라 부르며 자신들이 생각했던 차이보다 실제로는 더 큰 차이가 존재함을 깨닫는다.낮은 경제성, 다량의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많은 동독기업들은 수백만을 실직자로 만들며 문을 닫아야 했다. 정부는 1992년 후반세계적인 불경기가 독일로 밀어닥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통일 붐"을 유도하며 막대한 공공비를 지출한다. 스타치(Stasi), 동독 비밀경찰에 협조한 자료의 발표는 '신'민주주의자들의 사희 불신을 심화시킨다. 수 백명의 전직 SED관료와 판사들이 동독시절에 저지른 인권 침해으로 고발된다. 에리히 호네커는 쇠약해진 건강 때문에 살해죄는 면하나 칠레로 쫓겨가 그곳에서 1994년 5월 생을 마감한다. 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지만 동독의 장기적 전망은 밝다. 동독은 서독의 많은 지역도 갖추지 못한 최신장비와 기술을 받아들이고 있다. 1994년은 일대 전환기로 사회, 경제상황은 눈에띌 만큼 향상되었다. 한때 독일에 주둔했던 5천명의 러시아군인, 연합군과 그 가족들은 1994년 후반 철수하게 된다. 신나찌당은 동독전역에 불어 닥친 불경기와 동독지방의 혼란을 이용하려 하지만 약한 지지기반으로 의회에서 대여섯 좌석만 확보한다. 극우 동정주의자들이 이민자를 공격하고, 보호소 운영을 지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힘든 통일과정을 맛보며 동시에 유럽통합이라는 벅찬 과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독일은 '중심에 선 나라'라는 역사적 역할을 되찾아 가고 있다.
경제
국내 총생산 GDP : US$ 3조 6,52 억
1인당 국민총생산 GNP : US$ 40,415
연성장률 : 2.4%
인플레이션 : 1.8%
주요생산품 : 자동차, 기계 화학 등
주요교역국 : 프랑스, 네델란드, 이태리, 영국
문화
여행의 주목적이 독일문화의 답사라고 할 정도로 독일의 예술범위는 넓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문화적 진보가 많았고 이는 예술작품과 건축분야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음악에 있어서도 유럽최고의 풍요로운 음악전통으로, 초기 음악의 대부분은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18세기들어 급속히 번창하였다. 바하, 헨델, 베토벤, 바그너, 스투라우스,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말러 등 세기의 거장들을 배출해냈다.독일인들은 고기와 감자를 정말 좋아한다. 요즘엔 채식전용과 건강식 레스토랑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식당 밖에는 항상 메뉴와 가격이 적혀 있다. 칠판에 분필로 써놓은 그날의 특별메뉴, 그리고 일찍 문을 닫는 곳과 유명 식당의 쉬는 날(Ruhetag)을 주의깊게 보자. 독일인들은 하루식사 중 점심을 가장 신경써서 먹기 때문에, '오늘의 메뉴'가 점심 때만 가능 한 곳이 많다.
Gaststatte는 레스토랑보다는 가벼운 곳이며, Weinkeller나 Bierkeller도 간단한 식사를 즐기기에 아주 좋다. 독일식 아침식사에는 롤빵, 버터, 잼, 치즈, 몇 장의 고기, 삶은 달걀, 커피와 차가 나온다. 집에서 식사를 하는 이들은 점심을 주로 푸짐하게 먹고, 저녁때는 가볍게 치즈와 빵만으로 이루어진 저녁을 먹는다. 독일의 국민음료가 맥주임을 여행 중에 실감하게 될 것이다. 비교적 싸면서 맛도 좋은 맥주는 지역과 양조방법에 따라 각기 특징적인 색깔과 맛을 띤다.한때는 유머감각없고 너무 딱딱할 정도로 규율적이라 여겨진 독일인들은, 오늘날은 느긋하고 품위 있으며 인생을 즐기는데 훨씬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통일은 이런 생활방식을 동쪽으로 확산시키며 더 강하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발전과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독일인의 정서에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전히 사냥꾼은 녹색옷을 입고 굴뚝청소부는 모자를 쓰고 검은색 천을 덧댄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바바리아 여자들은 특유의 치마와 블라우스를 걸치는데 이를 디른들(Dirndle)이라 부르며, 바바리아 남자들도 바바리아 전통의상인 가죽 반바지와 로댄(Loden)이라 부르는 짧은 웃옷과 중절모를 특별한 날에 입는다.
현대독일에는 금기사항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독일인은 점잔을 빼지않는다. 수백만이 정기적으로 누드해안을 방문한다. 최근에는 정중한 예절을 지키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지만 여전히 중요하게는 여긴다. 매우 친한 친구를 제외하고는 헤어(Herr)와 프라우(Frau)를 평상시에 사용한다(그러나 실상은 친분이 있는 사이에서 사용되는 Du(너)라 불리는 것을 Sie(당신)보다 더 좋아한다). 직업명이 성대신에 종종 사용된다(예를 들면 Herr Professor 교수님 혹은 Frau Docktor 의사선생님). 만날때와 헤어질때 항상 악수를 하고 서로 아는 남녀의 뺨에 키스하는 것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동독인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제외하고는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과 유태인 학살은 터부시되는 화제거리이지만 기술 있게 이해심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함께 토론할 수 있다. 유태인 학살을 솔직, 대담하게 묘사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1994년 독일 전역에서 상영된 바 있다.
축제 및 행사
떠들썩한 추수행사에서부터 정장을 입는 오페라 축제까지 독일사람들은 파티에 젖어 있다. 겨울축제는 독일 전역에서 볼 수 있다. 쾰른, 뮌헨, 마인쯔 등 대도시에서는 애쉬 웬스데이(Ash Wesnesday)를 맞기 전 카니발 속에서 흥분의 도가니가 된다. 다양한 축제에는 또한 독일문화의 유산인 음악이 빠질 수 없다. 특히, Bayreuth의, 3월 바하 페스티발과 7월 바그너 페스티발 등 한 작곡가를 중점적으로 홍보하는 행사 등이 여러 지역에 걸쳐 다양하게 일어난다. 이 외 다양한 재즈페스티발을 만날 수 있는데, 프랑크푸르트(3월)와 스투트가르트(4월), 베를린(10월)이 가장 활기 넘치고 인기있는 재즈행사를 벌인다. 가을은 추수행사의 계절로, 특히 라인강 지역은 연일 불꽃의 축제로 떠들썩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 유명한 뮌헨의 10월축제(Oktoberfest)인데 명성에 반해 악몽의 축구관중들을 연상케하며 독일문화를 보여주기보다는 쇠퇴기의 관광산업을 보는 것 같다. 바바리아 대부분 지역에서도 맥주페스티발이 열리는데 10월축제보다 훨씬 매력적인 분위기다. 독일의 크리스마스축제는 독일가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며, 가장 화려한 크리스마스축제는 뮌헨(Munich)과 뉴렘베르그(Nuremberg), 에쎈(Essen)과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서 열리는 것이다.
1월
퀼른, 뮌헨, 뒤셀도르프, 마인쯔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다양한 행사의 카니발(Shrovetide,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파싱(Fasching)이라 하는 스로페티드)이 시작된다. 성회일 직전에 축제는 절정에 이른다.
2월
뉘른베르크에서 국제 장난감 박람회, 베를린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린다.
3월
프랑크푸르트 음악 박람회; 프랑크푸르트 재즈 박람회; 튀링엔 지방 바하 축제; 독일 전역의 봄축제; 아이제나하의 여름기원축제 등이 있다.
4월
스투트가르트 재즈 축제; 뮌헨 발래 행사; 만하임 5월 축제; 발푸르기스축제((Walpurgisnacht)-하르쯔산맥에서 노동절 전날 밤에 열립) 등이 있다.
5월
스투트가르트의 국제마임 축제; 뤼데스하임의 적포도주 축제; 드래스댄 국제 재즈 축제; 드래스댄음악 축제(5월 마지막주-6월 첫주) 등이 있다.
6월
코헴의 모젤와인 주간;할레의 핸델 축제; 킬의 보트경주 ; 뮌헨 영화 축제; 프라이부르크의 국제 연극 축제
7월
독일전역의 민속 축제; 뮌헨 오페라축제;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 베를린의 독일-미국 민속 축제; 쿨름바하 맥주축제; 바이마르의 음악세미나
8월
하이델베르그 고성 축제; 라인란트 지방의 와인 축제
9월-10월
뮌헨의 옥토버페스트 (세계 제일의 맥주축제); 베를린 음악&연극 축제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 박람회; 브레멘 자유시장; 라이프찌히의 게반트하우스 축제; 베를린 재즈페스트 등이 있다.
11월
라인란트 지역과 바이에른 지방의 성 마틴 축제
12월
뮌헨, 뉘른베르크, 베를린, 에센, 하이델베르그를 비롯한 많은 도시에서 크리스마스 축제가 열린다.
여행자 정보
비자 : 대한민국 여권소지자는 비자 없이 3개월간 머물 수 있다.
보건위생 : 비싼 의료비가 가장 주의대상이다.
시간대 : GMT/UTC + 1시간(여름에는 + 2시간)
전압 : 220V, 50 Hz
도량형 : 미터제 사용 (도량형 환산표 참조(영문))
외래관광객 : 연 1700 만명
경비 및 환전
통화 : 독일 마르크(Deutschmark (DM))
일반경비
저렴한 현지식사 : US$5-10
레스토랑 식사 : US$15-20
저렴한 숙박 : US$20-40
중급호텔 : US$50-100(2인실)
독일 통일과 화폐통합으로 물가상승률이 떨어진 마르크화는 다른 유럽 통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향이다.거금도 쉽게 쓸 수 있는 독일에서, 자제하는 마음으로 교통패스와 저렴한 패스트푸드, 또는 음식을 해먹는다면, 하루 US$50정도가 예상된다. 거의 모든 날을 식당에서 해결하고, 가까운 곳도 쉽게 교통수단을 이용하며 보송보송한 솜털이불이 있는 호텔에서 잔다면 적어도 하루 US$100 예상해야 한다. 주요 국제 신용카드인, MasterCard, Visa, American Express는 주요호텔이나, 주유소, 백화점 등에서 사용가능하나 일반적으로 널리 이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카드로 결재할 생각으로 식당에서 배불리 먹는 것은 금물. 현금인출기(ATM)는 독일전역에 있고, 환전은 대도시 은행과 환전소에서 일반적으로 할 수 있다. 팁은 일반적으로 주지 않아도 되나 정말 친절한 써비스에 대해서는 줄 수도 있다.
여행 시기
독일의 기후는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연중 어떤 기후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옷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5월에서 10월까지가 여행의 최적기이고 스키를 제외한 모든 스포츠와 관광을 즐길 수 있다. 크리스마스나 다른 휴일 전후에는 여행 성수기를 지나 여행객의 인적이 드물지만 기후는 매우 맑고 좋다. 동독은 온난한 서유럽의 해양성기후와 동유럽의 거친 대륙성 기후가 만나는 중간지대에 속한다. 베를린의 연평균기온은 11도이며, 1월에는 영하 1도, 7월에는 영상18도까지 올라간다. 연평균 강수량은 585mm이고 장마철은 따로 없다. 5월에서 9월 사이는 캠핑을 즐기기에 매우 좋다.
주요 여행지
베를린(Berlin)
독일 최고의 도시 베를린은 유럽내 어느 도시보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과거에 이도시는 프러시아의 군사적, 산업적 중심지로서 발전의 성숙기에 접어들었으나 2차 대전시의 수많은 폭격으로 조각나 버렸다. 전쟁으로 많은 인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베를린의 생산량은 아일랜드나 그리스의 총 생산량과 같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3세기 슈프리강(Spree River)에서 기원한 베를린은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중심무대를 한번도 내준 적이 없었다. 거대한 빌딩, 찬란한 박물관, 극장, 세련된 레스토랑, 차분한 나이트클럽 등에서도 독일의 심장부답게 냉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재통합이라는 거대한 계획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베를린 시는 독일의 무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곳이 기도 하다.
뮌헨(Munich)
맥주에 취하고 소세지로 배를 불린 다음 이곳을 돌아본다면 유럽 여느 도시와 같이 세계화된 도시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시 구석구석에서 뮌헨 시민들은 삶을 어떻게 즐기는지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 2000여개가 넘는 맥주홀이다. 뮌헨의 볼거리는 무궁무진한데 독일 어느 지역보다 많은 공연장과 풍부한 박물관, 다양한 공원들이 대표적이다. 우선 세계최대의 과학기술박물관인 독일 박물관(Deutsches Meseum)을 들 수 있는데, 마치 디즈니랜드와 스미스쏘니언 학회가 하나의 지붕아래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다. 깊은 탄광에서 천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문명이 총망라되어 있는 곳으로 너무나 넓어 다 둘러보기란 불가능하므로 흥미로운 곳만 골라서 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또 유럽에서 가장 큰 공원 중 하나인 영국공원(Englischer Garten)이 가 볼만하며, 특히 Schwabinger Bach를 따라 나 있는 산책로가 제일 멋있는 길이다. 햇살 좋은 여름날이면 나체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이 많은데, 평일 근무시간이라도 코트, 넥타이, 양복 등을 잔디 위에 단정히 개어 놓은 수백명의 나체 일광욕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침에 환전해 준 그 은행직원이 지금 잔디 위에서 일광욕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다카우(Dachau)수용소도 꼭 가볼 만한 곳으로, 1933년 3월 히틀러에 의해 건설된 최초의 나찌 수용소인 이곳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지만 20만명 이상의 죄수들이이곳을 거쳤다. 그 당시 뮌헨에는 1만명 가량의 유태인들이 있었는데 전쟁 후 20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뮌헨은 독일전역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프라하 동북쪽, 로마 남쪽까지 연결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마인(Frankfurt/main)
'뱅크푸르트'또는 '마인하탄' 등의 별칭을 지닌 도시이며, 특히 마인강이 도시중앙을 흐르고 있어 일반적으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이라 불리운다. 이것은 폴란드 국경 근처에 있는 프랑프푸르트/오데(Frankfurt/Oder)라는 도시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프랑크푸르트/마인은 서부 독일의 금융 중심지이며 지리적으로도 중심에 위치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박람회, 소비재 박람회, 악기박람회 등 중요한 무역박람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65만에 이르는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독일경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도시 세금의 10% 이상이 문화발전에 할애되고 있다. 따라서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부유한 박물관들이 대부분 이 곳에 모여있게 되었다. 르네상스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세계예술작품들이 전시된 슈타델박물관(Stadel Museum)과 유명한 독일작품들이 전시되는 현대미술박물관(Museum fur Moderne Kunst) 등이 있다프랑크푸르트는 또한 음악으로 활기찬 도시이며, 특히 재즈로 유명하다. 프랑크푸르트산 독주에는 Ebbelwei가 있다.프랑크푸르트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마르부르크 (Marburg)는 재미있는 까페와 펍문화가술렁이는 활기찬 대학도시이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하이델베르크는 1693년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웅장한 하이델베르크 고성과 중세거리를 보려는 관광객들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연 4백만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한다). 마크 트웨인이 유럽여행을 시작한 곳이 바로 하이델베르크였으며, 영국의 터너 역시 하이델베르크를 사랑했다고 한다. 터너는 이곳에서 영감을 받은 위대한 풍경화들을 많이 남기었다. 하이델베르크는 학생들(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다)이 많아서 그런지, 인구 14만명인 도시치고는 매우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성수기(7-8월)에는 도시전체가 관광객들로 초만원을 이루니, 가능하면 이 때를 피하는 것이 좋다.하이델베르크성은 독일 고딕-르제상스양식의 결정체로 이 도시 제일의 관광명소이다. 반쯤 폐허가 된 모습이 이 성의 낭만적인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구시가 어느 곳에서나 언덕을 뒤덮은 이 웅장한 붉은 사암 성곽을 볼 수 있으며, 221,726리터의 저쟝량을 갖는 18세기의 거대한 포도주 저장통(Grosses Fass)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이다. 하이델베르크는 저렴한 숙박지가 별로 없으며 음식값 비싼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들이 꾸준히 몰려드는 것은, 하이델베르크 성의 낭만적인 매력과, 멋진 광경에 숨을 헐떡거리며 몇번이나 걸음을 멈추게 하는 좁은 언덕길 산책로 등으로 이 도시가 여행자를 유혹하기 때문일 것이다.Frankfurt, Stuttgart, Munich 등 여러 지역에서 하이델베르크까지 기차가 연결된다.
뤼벡(Lubeck)
독일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에 있는 뤼벡은 한자동맹의 여왕으로 알려진 중세도시로서, 12-16세기에는 발트해 지역의 무역을 지배했던 한자동맹의 수도였던 곳이다. 함부르그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뤼벡은 주요관광노선에서 벗어나 있어 남쪽의 다채로운 관광지에 비해 조용한 곳이다. 구시가는 2차대전 시 심각한 폭탄 피해지역이었으나 아주 신중히 다시 건설되어 오늘날 위엄있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저렴한 숙소와 식당이 많이 있는 뤼벡은 또한 흥겨운 꼭두각시극의 본고장으로 한번 쯤 꼭 보는 것이 좋다. 마리엔 교회(Marienkirche)에는 2차대전 시 잇단 폭격으로 교회의 종이 돌 바닥에 부서진 채로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것은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증거'라는 문구와 함께 전쟁을 고발하기 위해 주민들이 그대로 보존한 것이다. 마리엔 교회 북쪽에 있는 부덴부르크하우스(Buddenbrookhaus)는 토마스만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소설 '부덴부르크가의 사람들'로 이 집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튀빙겐(Tubingen)
슈투트가르트에서 남쪽으로 35km 떨어진 튀빙겐은 그림같이 고요한 대학도시이다. 반목조 가옥들과 오래된 돌벽들을 감상하며 오솔길을 거닐어 보자. 지금은 대학건물로 사용되는, 르네상스양식의 호엔튀빙겐 성(Schloss Hohentubingen)에 오르면 고풍스런 도시의 전경이 경사진 붉은 지붕들 위로 한눈에 들어온다.튀빙엔은 슈투트가르트에서 당일코스로 쉽게 다녀올 수 있으며 튀빙겐행 기차는 매 2시간마다 있다.오늘날 이곳의 학생들은 자유로운 지적 전통을 지켜온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며 어느 까페에서든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저녁거리를 위해 과일과 야채로 풍성한 이 곳의 시장을 산책 겸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프리지아 군도(Frisian Islands)
프리지아 섬들은 모래사장, 바다, 맑은 공기, 태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곳이다. 이곳은 네덜란드 북부에서 해안선을 따라 덴마크까지 이르고 있다. 많은 주민들이 프리지아 방언을 쓰는데, 프리지아어는 영어에 매우 가까우나 사실 알아듣기 힘들다. 북프리지아 섬들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서부해안지역이며 덴마크에도 접한 곳이다. 해양지역은 Wattenmeer국립공원을 형성하고 있으며 특히, 암룸(Amrum), 푀어(Fohr), 랑게네스(Langeness)섬들의 모래언덕이 인상적이다. 이곳의 야생동물과 가축들은 엄격한 법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북프리지아 군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은 질트(Sylt)로, 온천, 해양스포츠, 고급레스토랑 등으로 유명한 휴양지이며 여름이면 매우 붐비는 곳이다. 이웃한 푀어와 암룸 섬이 보다 편안하면서 덜 붐비는 곳이다. 프리지아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갖다 올 수 있는 헬리고란트(Heligoland)섬은 2차 대전 시 해저기지였으며 아직도 지하터널과 벙커들을 관람할 수 있다. 섬 주변의 산책로도 멋있다.
하르츠 산맥(Harz Mountains)
주로 독일인과 스칸디나비아인에게 알려진 하르츠 산맥에는 알프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높은 봉우리와 계곡은 없다. 그러나 알프스의 상업주의와는 달리 사계절 내내 스포츠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지역이다. 한때 이 지역에는 은과 납, 구리 등을 캐는 광산들이 많이 있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아 눈요기 거리만 되고 있을 뿐이다. Naturpark Harz는 하이킹하기에 좋은 지역으로 경치도 아름답다. 자전거여행에도 인기있는 지역이지만 구불구불 나 있는 산악도로 일부는 자동차와 같이 달려야 하므로 출발 전 지도를 체크해 보는 것이 좋다. 활강스키는 완만한 경사면과 설질로 기대 이하일 수도 있지만,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뛰어난 코스를 가지고 있다.
레저스포츠
일인 3명 중 1명이 운동클럽 회원에 가입되어 있을 정도로 독일에는 휼륭한 자연시설이 갖춰져 있다. 싸이클은 가장 일반적인 취미거리로 많은, 서독의 도시에는 훌륭한 자전거길이 갖춰져 있고, 손상된 도로들이 더러 있지만 동독도 자전거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다. Black Forest와 하르쯔산(Harz Mountains), 바바리아 알프스 외 많은 곳에 훌륭한 하이킹트레일이 나 있다. 알프스지역이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이지만 사람들로 붐빈다(특히 휴가철). 겨울철 스키는 다운힐과 크로스컨트리 모두에 더없이 훌륭한 지역이다. Black Forest지역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경사가 심하지만 역시 인기 있는 스키지역이며, 따뜻한 계절에는 숲을 여행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독일의 강과 호수들은 보트타기에 더없이 좋으며 특히 남부독일과 발틱해에서 거대한 호수지역을 형성하는 베를린 근방 크루즈가 가장 인기 있다. 항해와 윈드 써핑은 남부 콘스탄체(Constance)호수지역에서 인기 있다.
독일로 가는 길
독일의 주요 항공관문은 프랑크푸르트, 뮌헨, 베를린이며, 그 중 프랑크푸르트는 런던의 히드로 공항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혼잡한 공항이다(한국에서 독일로 갈 때도 대부분 이곳으로 도착한다). 공항 출국세는 US$5정도이며 항공요금에 포함되어 있다. 유럽대륙에서 독일로 들어올 때는 버스나 기차가 싸고 편리하다. 독일은 다른 유럽국들과 훌륭한 도로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유럽과 연결된 도로는 많이 개선되고 있지만, 국경지대에서 지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특히 폴란드에서 올 때는). 자동차나 오토바이로 독일을 입국할 때는 제3자 보험에 가입 되 있어야 한다. 배편은 독일 북부연안과 스칸디나비아, 영국, 세인트 피터즈버그사이에 운행된다.
국내 교통편
독일 국내여행은 편리하다. 국내선항공은 광범위하게 연결되나 정말 다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경비를 생각할 때 굳이 이용할 필요는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기차여행으로 독일기차시스템은 완벽에 가깝다. 동부와 서부의 기차시스템은 현재 모두 합병되었으나 동부가 가격면에서 아직까지는 싸다. 다양한 요금과 패스들이 있으며, InterCity Express (ICE)를 탈 때는 추가요금이 있는데 독일전역을 250km/h로 달린다고 칠 때 그만한 가치가 있다. 기차연결이 힘든 외지를 여행할 때가 아니라면 버스여행은 기차와 경쟁이 되지 않는다. 독일의 도로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며, 자동차여행을 할 때 완벽할 정도이나, 도심에서 주차가 문제된다. 속도 무제한 아우토반(autobahns)을 달리는 것은 최고의 기분이기도 하지만 악몽일 수도 있다 : 눈 깜빡할 사이에 추월해 가는 포쉐, BMW의 괴물 스피드라이트와 지겨운 트래픽 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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